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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유대 신학

인용 2015. 9. 20. 23:58 |

 

독일주의와 유대주의

지금까지 우리가 재구성한 논쟁들은 서구 기독교가 물려준 유산에 관한 것이다. 대망의 분리주의는 기독교 정치신학의 위기에 대한 반응이었고, 신교 자유주의 신학은 그 반응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19세기 독일, 신교도가 아닌 유대교도에 의해 그 논쟁에 다른 중요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프랑스혁명 전까지 유럽의 종교-정치 논쟁은 기독교도에 국한돼 있었다. 그런데 15세기 말유대인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된 이후 유대인 사이에 지적 각성이 일어나면서 유대 사상은 유럽 문화와 널리 접촉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정치적 문제를 포함한, 기독교 문명의 근본적인 문제들과도 더욱 깊이 접촉을 하게 되었다. 그런 운명적인 결합은 독일에서 보다 많은 열매를 맺었거나 아니면 갈등이 더 심했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대인들은 나폴레옹이 정복한 땅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서 조금씩 자유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 법적 과정이 공국과 왕국으로 나뉘어 있던 독일에서는 반혁명적 적대감과 기독교 우월주의로 인해 느리고 평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독일의 유대인들은 유럽 어느 국가에서보다 더 신속하게 그곳 문화 생활에 동화되었다. 19세기 독일의 모든 사상--계몽주의, 낭만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이 유대인의 의식에 흔적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자유주의적 신교 신학이었다.

그런 희한한 발달은 자유주의 신학 뒤에는 근본적으로 변증법적 충동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면 이해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교의 본래 목적은 마력과 기적을 점점 덜 믿는 시대, 과학이 신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자연의 작용을 설명하는 시대, 학자들이 인간 관습의 역사적, 지리적 다양성을 밝혀내는 시대, 유럽인들이 그들 자신의 절대적 자유결정권을 확신하게 된 시대에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 모든 발달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일어났으며 근대 독일 생활을 지탱하는 데는 개혁된 신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세기 유대 신학은 그 모든 사회적, 지적 도전에 직면해 있었고,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근대 신교주의 앞에서 유대교를 변호하는 일이었다.그래서 젊은 독일인 신교도가 슐라이어마허와 슈트라우스의 글을 연구하는 동안, 젊은 독일인 유대교도는 자유주의 유대교--그것이 유대인들을 근대와 독일 정부에 완전히 동화시키리라는 희망 속에서--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 두 가지 자유주의 신학은 결합했다. 하지만 때로는 마찰을 빚기도 했다. 자유주의 신교가 독일은 여전히 기독교 국가이며, 국가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신교가 필요하다고 독일인들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적일수록, 자유주의 유대인들이 그런 국가에서 자신들의 설 자리를 주장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자유주의 유대 신학은 그런 모순 위에 세워졌고 1세기 동안 지적, 문화적 성공을 맞본 뒤 산산조각 나게 될 것이다.

변증론에서 출발한 자유주의 유대교의 기원은 정확하게 그 시점을 더듬을 수 있다. 나폴레옹 패배 이후 민족주의적 감상의 물결이 독일을 덮쳤고, 1819년 일련의 반유대인 유혈폭동이 터지면서 유럽의 유대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그에 각성한 유대인 학자들이 독일의 대학 내에 유대학과 설립을 목표로 하는 '유대인 문화·학문 연구회Association for the Culture and Scholarly Study of the Jews'를 발좃했다. 새로운 역사적, 문헌적, 철학적 방법을 흡수하고 유대교 연구에 적용함으로써 유대교 세계 내에서 전통에 얽매인 랍비나 율법학자들에 맞서 개혁을 추진하기가 용이할 것이며, 그와동시에 기독교 학계의 인정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희망했다. 기독교인에게 성서학부가 있듯 유대인에게도 유대학부가 있게 될 것이다. 사실 그런 학부들이 19세기 독일에서 나란히 성장해 나갔고, 독일은 종교 연구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기독교와 유대교 사상가들의 공통점은 개혁과 근대화에 대한 욕구였다. 그 욕구는 신교 내에 이미 깊숙이 내재돼 있었고 19세기 이전에 많은 일을 한 상태였다. 그러나 18세기 유대교 계몽운동Haskala 때 모제스 멘델스존과 제자들의 노력을 제외하고는 유럽의 유대교를 근대 사회에 순응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개혁의 바람은 유대인 추방 초기 이후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했고, 보편적으로--심지어는 학계에서도--환영을 받진 못했다.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회당 기도가 지방 방언으로 번역되었고, 오르간 음악이 예배에 사용되었으며, 회당 건물도 예배 분위기가 밝고 개방된 쪽으로, 또 거리에서 볼 때 외관상 더 "독일식" 인상을 주는 쪽으로 근대화되었다. 하지만 모두 피상적인 적응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유대교 역사를 재해석하여 기독교 교파들과나란히 또 하나의 종교적 "교파"로 묘사하고자 하는 지적 노력이었다. 새로운 신앙은 민족적 요소와 독특한 전통을 지니긴 했으나 근대 국가에 정치적 도전이 된다거나 유대인들이 독일에 동화되는 데 문화적 장벽으로 작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불후의 역사서들이 그런 관점에서 쓰였고, 그중 아브라함 가이거의 <<유대교와 그 역사>>(1864~71)는 오늘날까지 그 가치와 영향력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유대교를 인류의 발달 과정에서 중요하지만 한물간 중요한 존재로 비하한 헤겔의 종교철학 내에서 만만찮은 지적 도전에 직면했다. 만약 종교사와 국가에 관해 헤겔이 옳았다면, 계몽된 유대인에게 선택은 근대 독일의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순응해 버린 온건한 자유주의 신교로 개종하는 길밖에 없는 듯했다. 유대교적 개성의 정당함을 옹호하고자 하는 근대 유디안 사상가는 누구나 선택을 해야 했다. 헤겔 사상과 유대교가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그 둘을 재해석하거나,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헤겔 사상에 대한 철학적 대안을 찾아야 했다.

 

마크 릴라, <<사산된 신: 종교는 왜 정치를 욕망하는가>>, 마리 오 옮김, 바다출판사, 2009, 238~241쪽.

 

 

 

 

Posted by the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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